獨島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Ⅰ
━━━━━━━━━━━━━━━━━━━━━━━━━━━━━━━━━━文玉敎職노트 14-12
한국교육신문(EDNEWS)검색기사일자: 96/03/05
    일본이 독도를 인지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로는「隱州視聽合記」가 最古의 것이다. 1667년에 저술된 이 견문록에는 「隱岐島인 隱州에서 서북방으로 배로 2日1夜 걸리는 곳에 竹島(울릉도), 松島(독도)가 있는데,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으며, 일본의 영토는 이 주(隱州)에 한한다」고 하였다. 즉, 울릉, 독도는 隱州의 경계 밖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같은 일본의 영토개념은 19세기 초까지 이어지다가 島根縣 告示를 전후하여 독도의 認知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측의 어떠한 자료에서도 독도영유를 주장할 수 없었던 까닭에, 이제는 반대로 한국측이 獨島를 일찍부터 認知, 경영하였다는 기록 속에 하자가 발견되면 이를 통해 부정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川上健三씨가 1966年에 발표한 「獨島の歷史地理學的 硏完」 와 大日熊良씨가 1968年에 편간한 『竹島史稿』에 나타나는 논고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이 新增東國與地勝覽의「于山島,鬱陵島」條에「일설에는 于山과 울릉이 원래 한 섬이다」고 한 것이 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과 혼동된다는 점, 또 조선시대 太宗代 이래 空島政策으로 독도를 인지 경영하지 못하였다는 점에 대한 논란이 그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강원도 蔚珍縣條에는 부속 도서로서 于山島와 武陵島를 열거하고 于山, 武陵 두 섬은 현의 동쪽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의 거리가 멀지않아 날이 맑으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다.

    武陵은 울릉도를, 于山은 獨島를 지칭하므로 따라서獨島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을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우리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던 섬이었다. 그런데 일본학자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앞의 문구를 트집삼아 于山이 곧 울릉도 옆의 竹嶼를 말하는 것이라 우기고 있다. 심지어 울릉도에서는 독도가 결코 보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울릉도 앞의 船上에서는 獨島가 보이지 않는다는 等式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기록은 울릉도 앞의 船上이 아니라 울릉도의 高地에서의 것을 말함인데, 이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울릉도가 숲이 우거져 사람이 오를 수 없을 것이라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논리가 한국학자에 의해 억지임이 드러나게 되자, 이번에는 조선시대에 空島政策을 실시하면서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까지 放棄하였고, 그 결과 獨島의 경영은 물론 인지조차 불가능한 것이 당시 한국의 상황이었으므로 이 사이에 일본이 영유하게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空島政策은 울릉도, 독도에 한해 펴진 정책인데, 이는 일본해적(倭寇)을 방비하고, 탈세범의 은닉을 막기 위한 것이지 영토의 포기가 아니었다. 조선 태종 때 시행된 이래 수시로 정부에서 이곳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숙종 때 이후에는 3년에 1차로 三陟僉使 또는 越松萬戶가 수토하면서 관리했던 것이다.

    이는 엄연히 울릉도, 독도의 관할권 행사로 봐야 한다.

    설사 한국의 이러한 역사적 권원이 해석상에 차이가 있더라도, 우리나라가 근대국가가 된 다음 실효적 영유를 시행한 일에 대하여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1900년에 이르러 울릉도에서 口本人들이 함부로 목재를 벌채함에 따라 內部視察官인 禹用鼎을 파견한 바 있는데 그는 울릉도의 현황을 조사한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이 보고서에 따라 조선 의정부는 칙령 41호로 「鬱陵島를 鬱島로 改稱하고 島監을 郡守로 개정한 件」을 의결, 1900년 10월 27일자로 官報에 게재, 반포하였다.

    이 칙령 41호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2조에서 울릉군의 관할구역으로 울릉全島, 竹島와 함께 石島를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石島는 곧 獨島를 가리키는 것이다.

    石島는 훈독하면 「돌섬」또는 당시 울릉도에 많이 거주하던 전라도 연해어민의 방언으로「독섬」인데, 1906年 울릉군수 沈興澤의 보고서에 보이는 「獨島」와 더불어 이들 독섬, 돌섬에서 생긴 호칭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근대적 영토편입조치 역시 일본의 島根縣 告示보다 무려 5년 앞서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토편입에 관한 양당사국 간의 분쟁은 일반 민사소송과 달리 양당사국이 동시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야만 재판이 성립된다. 따라서 일본이 아무리 제소하려해도 한국이 응하지 않으면 소송이 제기되지 않으며, 설사 제소된다 하더라도 국제법상 영유주장을 먼저 반포한 나라에 유리하게 판결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칙령 41호는 국제법상 절대적인 효력을 발한 조치이다.

    독도 영유권에 관한 분쟁이 야기된 이래 국내 몇몇 학자들이 은밀히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여 왔고, 그 결과물이 없는 것이 아니나, 앞으로도 관계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하여야 할 것이며 합리적으로 체계적인 연구가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만큼 정부가 보다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이들 학자들에게 부여하여야만 할 것이다.